간밤에 잘 잤다.
아침이 생생하다. 아직 조금 졸립지만,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이다. 얼른 일어나 하나씩 해결해야지. 일단 프로틴 쉐이크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하자. 그런데 싱크대에 쉐이크통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 집에 와서 안 꺼내놨던가? 가방을 열었다. 없다. 다시 찾아봤다.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세상에. 생각해 보니 어제 사이클 탈 때 옆 거치대에 걸어두곤 그냥 두고 와버린 것이 아닌가.
'어떡하지?'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잃어버린 걸까? 조금 있다 체육관에 가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까? 당장 오늘 아침 프로틴은 어떡하지? 맨 우유를 마셔야 하나? 자리에 앉아 당황스러운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이럴 때가 아니다. 가방을 다시 찾아보자. 방바닥에 탈탈 털었다. 바로 후회가 몰려온다. 여전히 쉐이크통은 오리무중이지만 대신 방바닥이 지저분해졌다. 구시렁거리며 쏟아진 짐을 가방에 차곡차곡 담았다. 별 수 없다. 감격스러운 상봉과 확실한 이별 중 하나일 이 이야기의 결말은 체육관에 나가야지만 확인할 수 있다. 그나저나 아침 프로틴은 어떡하지?
부랴부랴 체육관에 도착
불과 몇 시간 전에 이곳에서 땀 흘리며 '오늘도 좋은 하루였다'하며 만족해 했었는데. 사뭇 분위기가 달라졌다. 있겠지? 없으려나? 누가 들고 갔으면 어떡하지? 아니 정신 나간 놈아, 누가 남이 쓰던 쉐이크통을 들고 가. 하지만 세상에는 기상천외한 사람들이 많은걸? 설사 들고 갔더라도 네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원효대사가 그랬듯 해골바가지에서 파워 드링킹했던 물을 모두 게워낼 거야. 그러려나? 잠깐... 뭔가 의식의 흐름이 자꾸 부정적으로 흘러간다. 이쯤에서 끊어야지.

"검은색 물통은 들어온 게 없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 없다고? 어째서? 누가 더러운 해골바가지를 들고 간단 말인가?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야박한 사회가 됐지? 헬스인들 사이의 의리가 고작 이 정도였단 말인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어제 달렸던 사이클 기기 옆 거치대를 확인했다. 애꿎은 여백이 나를 반긴다. 쉐이커통이 사라지면서 내 마음에 패인 깊은 구멍을 닮았다. 차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였다. 없다. 아무리 봐도 없다. 어째서 없지? 세상이 언제부터 이렇게 각박졌지? 이게 나라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직원 눈길을 피해 쓰레기통과 재활용 통을 뒤져봤다. 없다. 애써 부정해온 미래가 이렇게 들이닥쳤다. 그래, 보낼 친구는 보내고 쇠질이나 하자.
집중이 될 리가 없잖아.
쇠질 한 번에 분노 한번. 쇠질 한번, 울분 한번. 쇠질 한번, 탄식 한번. 쇠질 한번, 눈물 한 방울.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지 않는다. 비록 나에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물통이지만, 그렇게 더러운 통을 도대체 누가 들고 간단 말인가? 심지어 세척도 잘 하지 않아 세균이 득실득실한데.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가? 직원 중 한명이 아닐까? 내가 집에 둔 것은 아닐까? 탈의실에서 떨어뜨렸나? 어제 몇 번 사물함을 사용했더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안되겠다. 직원분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탁하자. 나중에라도 찾으면 꼭 보관해두었다 전달 부탁드린다고. 선물 받아 몹시 소중한 것이다. 그래, 이 세트만 끝내고 말하자. 그러고 내게 주어진 이 비극적인 운명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노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카운터로 향하던 중, 혹시 하는 마음에 사이클 기기들이 있는 곳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분명 내가 어제 탔던 사이클 옆 거치대에는 없다. 먹먹하다. 한숨을 내쉬며 그 앞 사이클 기기를 허망하게 쳐다보는데, 내 쉐이커통이 딱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기억력은 매우 하찮다.
잘 알고 있는 명제이지만 이렇게나 허무하게 상기 당하다니. 쉐이크통은 내 마음을 오전 내내 괴롭혔던 번뇌가 무안할 정도로 멀쩡한 상태로, 전날 내가 둔 모습 그대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어제 마시다 남은 물까지 그대로. 허탈함이 찾아온다. 결국 이럴려고 오전 내내 그렇게 고뇌하고 속상해했구나. 오전 내내 이렇게 허무하게 보냈구나.
네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말 되게 많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양해하길 바란다. 머릿속이 정말 산만한 요즘이다. 이렇게라도 배설해야겠다. 첫째로 쪽팔림이 떠올랐다. 나는 불과 며칠 전에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하고, 전자에 집착하지 말고 후자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말을 내뱉었다. (심지어 관련해 글도 썼다.) 한 친구는 내 말에 몹시 감명 받았다고 고백했었다.
두 번째는 내가 몹시도 좋아하는 선불교 돈오점수 이야기.
산행 중인 두 스님이 비 때문에 물이 깊어진 개울 앞에 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 여인을 만났다. 불가의 승려들은 여인과의 접촉을 지양해야 하는 관계로 B 스님은 여인을 무시했다. 그런데 A 스님이 여인에게 다가가 여인을 업고는 개울을 건넜다. 여인의 살결이 살짝 비쳤다. 몹시 언짢은 B 스님은 말을 아꼈다. 개울을 건너자 두 스님은 여인에게 인사하곤 마저 길을 떠났다. 10리 정도 지났을까? 화가 난 B 스님이 A 스님에게 따졌다. 어찌하여 불가의 사람이 서슴없이 여인과 신체적 접촉을 한단 말인오? A 스님은 B 스님을 조용히 쳐다보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나는 그 여인을 개울 건너편에 내려두고 왔건만, 자네는 여전히 업고 계시는구려.'
세 번째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형님 이야기.
학창 시절, 형님이 진료하는 보건 진료소를 찾아갔을 때였다. 형님은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안에 들어서자 자그마한 도자기 찻잔을 꺼내 차를 내어주었다. 자신이 20대 때 공방에서 직접 구운 잔이라며 소개하는데, 무언가 엉성한 듯하면서도 훌륭한 균형을 이뤄 형님을 닮았단 생각을 했다. 진한 향의 차를 음미하고는 잔을 내려놓았는데, 모퉁이에 올려둔 잔이 균형을 잃고, 만유인력의 법칙에 순응하며 바닥으로 나아갔다. 바닥과 잔이 만나자 뉴턴의 세 번째 운동 법칙에 따라 충돌이라는 작용이 박살이라는 반작용으로 이어졌다.
형님은 조금 전까지 잔이었던 조각들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미안함에 온몸이 굳었다. 찾아와서 선물을 주지 못할망정 잔을 깨뜨리다니. 그런데 이어지는 형님의 말과 행동은내가 평생 가져갈 충격으로 남았다.
"얘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구나."
그 한마디를 끝으로 형님은 처참한 잔해를 하나 둘 조심스럽게 주웠다.
"기왕이면 얘가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싶네."
진료실 밖, 사람들의 발길에서 떨어진 나무뿌리 아래에 찻잔의 유해를 뿌렸다. 흙으로 구운 잔이 흙으로 돌아갔다. 인사를 나누듯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곤, 변함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저녁으로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었다.
마지막은 언행일치.
아무리 좋은 교훈을 알고 있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존경스러운 사람은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현실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물건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물건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구속되지 않을 때 해방된다. 작은 쉐이커통으로 시작한 해프닝이 이런 장구한 반성의 글로 이어졌다. 부디 이번 사건을 통해 조금은 언행일치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나 말이야 나.
한 줄 요약 : 이 쉐이커통 진짜 좋다. 추천한다. 꼭 사라. 두 번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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